접시꽃 당신 /도종환 /시
접시꽃 당신
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.
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.
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 까지
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.
아침이면 머리 맡에
흔적없이 빠지는 머리칼이 쌓이듯
생명은 당신의 늪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.
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
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
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, 할
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
논두렁을 덮은 망초대와 잡풀가에
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.
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
남루한 살림의 한구 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
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
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.
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드려야 할
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
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.
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
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
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.
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
살아온 날처럼 ,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
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드려야 함을 압니다 .
우리가 버리지 못했던
보잘것없는 눈높이와 영혼까지도
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
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
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.
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....
도종환/시