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좋은글 좋은 시

정지용 향수

by 부산 사투리 2024. 2. 25.
정지용 ‘향수’ <1927년>





넓은 벌 동쪽 끝으로

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,

얼룩백이 황소가

해설피(해질 무렵)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,

―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.



​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

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,

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

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,

―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.



​흙에서 자란 내 마음

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

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

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,

―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.



​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

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

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

사철 발벗은 아내가

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,

―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.



​하늘에는 석근(여러 모양의 별들이 섞여 빛나는 모습) 별

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,

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

초라한 지붕,

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,

―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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